이전에 이집트가 서구 열강이었던 영국, 프랑스에 대항해 본인들의 주권을 찾아냈던 수에즈 운하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그리고 주변 중동 국가들은 이를 지켜보고 있었죠.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저항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본 중동 국가들은 하나씩 본인들이 가진 석유를 바탕으로 서구 열강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이집트를 시작으로 어떤 국가들이 대항했고, 그 중심에 있었던 OPEC애 대해서 다뤄보겠습니다. 그리고 현대 정세와 유사한 관계가 형성된 이란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죠.
오스만 제국 해체 부터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까지, 중동 국가들은 구미 국가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석유를 통해 돈을 벌 수 있게 되었고, 당시의 중동 국가들은 석유를 캐서 팔 수 있는 인프라가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 아랍 국가들은 광구 사용료를 지불하고 석유를 캐가는 대형 석유 기업들이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상당히 기이한 수익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우리가 잘 아는 미국 석유 기업인 아람코가 1949년 당시에 사용료의 3배가 넘는 막대한 수익을 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에 지불하는 금액 보다 미국 정부에 지불하는 세금이 더 많았죠. 이는 중동 국가 입장에선 불합리한 구조라 판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집트가 구미 국가들에 저항하며 권리를 되찾는 모습은 다른 중동 국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 꼴이 된거죠. 당시 석유 수입을 산유국과 석유 기업이 배분할 때, 산유국이 가져가는 이익이 전체 이익의 50%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43년 베네수엘라가 석유 기업과 교섭을 벌여 5대5로 맞춘 것을 보고,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1950년 5대5 배분 교섭에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 이상의 배분을 받고자 하는 협상에는 기업들이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랍 국가들의 반발을 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국제 석유 회사들이 산유국들과 상의도 없이 석유 가격을 인하해버린 겁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석유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너도나도 석유를 캐서 팔려 했기 때문에, 시장에는 석유가 넘쳐나다 못해 재고가 쌓이고 있었죠. 안그래도 수익 배분에서 불합리하다고 판단하던 찰나에 석유 가격까지 인하하는 것은 산유국인 아랍 국가들 입장에선 국가 재정적으로도 치명적이었습니다. 쌓일대로 쌓인 불만이 폭발하게된 트리거가 되었고, 1960년 바그다드 회의에서 베네수엘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이란과 쿠웨이트가 함께 OPEC을 창설하게 됩니다.
OPEC이 창설되고 산유국들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에도, 국제 석유 기업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리비아에서 무아마르 카다피 대위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리비아는 본래 이탈리아의 식민지였으나, 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배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리비아 정부 역시 구미에 친화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죠. 국민들의 반감이 지속되던 중 1969년 카다피 대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습니다.
정권을 잡은 이후 카다피는 구미의 석유 기업들과 교섭을 통해 수익 배분을 55%로 상승시키고, 석유 가격 인상안을 밀어부쳤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을 본 다른 국가들 역시 차례로 교섭에 성공하며 난공불락 같았던 5대5 수익 배분 구조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한 때 석유 기업들이 지배했던 중동 산유국들이 자주권을 가지게 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석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무기로 전 세계에 영향력을 펼치기 시작했고, 그 시작은 바로 이스라엘 공격이었습니다.
중동의 희망을 안겨준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서거하고, 사다트 대통령이 그 뒤를 이어 이집트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이어져온 석유를 통한 압박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 일환으로 구미 국가들에게 석유로 압박하며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전 세계 석유 공급을 중동 국가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작전이 먹힐 것이라 확신한 사다트 대통령은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다른 아랍 국가들이 석유를 쥐고 이스라엘에 지원을 못하게 압박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의 골칫거리였기 때문이죠.
1973년 10월 6일, 이집트는 이스라엘에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전에 벌였던 전투에서 번번히 패배했기 때문에, 이번 공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격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 있는 속죄일을 공격 날짜로 결정했죠. 아랍 국가들 중 군사력이 가장 강력한 이집트가 총공격을 개시하자, 제아무리 이스라엘이라 하더라도 당할 수 밖에 없었죠. 이러한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자 소련은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반대편 진영의 수장인 미국은 이스라엘에 무기 공급을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73년 10월 16일, 아랍 산유국의 석유 담당 장관들이 쿠웨이트에 모여 석유 가격의 17퍼센트 인상을 결정하게 됩니다. 앞서 국제 석유 기업들이 아무런 상의도 없이 석유 가격을 인하한 것과 같이, 일방적으로 석유 가격 인상을 단행했죠. 그 내용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드리면,
- 이스라엘군이 1967년에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하기 전까지매월 5퍼센트씩 석유 생산량을 삭감한다.
- 수출 삭감은 이스라엘에 물질적, 도의적으로 가담한 국가만을 대상으로 한다. 이스라엘에 가담한 국가에는 머지않아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한다.
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석유 소비량이 급증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상당히 치명적일지 몰라도, 미국은 이스라엘을 버릴 수 없었죠. 결국 미국에 대한 전면 금수 조치를 단행하고 국제 석유 가격은 반년 사이 4배가 올랐습니다. 석유 소비량의 45%를 중동 국가에 의존했던 일본 뿐만 아니라 70%가까이 중동에서 석유를 수입하던 유럽에도 비상이 걸리게 됩니다. 이러한 압박에 미국은 어떻게든 이를 마무리해야 했고, 미국과 소련의 주도하에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지역의 일부를 이집트와 시리아에 반환하는 것을 약속하며 마무리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 역시 큰 혼란을 겪었죠. 이 사건이 바로 1차 오일 쇼크 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서방 국가들은 중동 국가들이 석유라는 인질로 전 세계를 압박한다면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올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고, 이전 처럼 만만하게 대했다가는 큰일 날 수 있겠다는 공포감을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1차 오일 쇼크 이후, 배럴 당 3달러 수준이었던 석유 가격이 10달러를 넘어갔습니다. 기존의 산유국들은 3~4배가 넘는 이익을 챙길 수 있게 되었죠.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을 비롯한 산유국들은 막대한 양의 돈을 통해 인프라를 구축하고, 국민들은 돈 한푼 내지 않고도 훌륭한 인프라에서 교육도 받으며 질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동의 희망이라 불리었던 이집트는 해당 사항이 없었죠.
안그래도 이스라엘과 전쟁으로 인해 세수가 부족해진 이집트는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1977년 사다트 대통령은 빈곤층에 대한 식량 보조금을 중단하려 했으나 국민들의 반발로 철회하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선 부족한 세금을 충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해외로 눈을 돌려 리비아를 침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국제 여론 뿐만 아니라 자국 안에서도 아랍 국가간에 전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침공 9일만에 철회하게 되었습니다.
대내외적인 방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계획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스라엘과 화해하는 방법이죠.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화친을 통해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유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아랍 연합은 반발했죠. 이집트는 유전은 없었지만, 많은 인구를 통해 항상 아랍 연합의 선봉에 섰던 국가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겠다고 하니, 향후 중동의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 간의 분쟁에서 불리해질 수 있겠다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집트는 1977년 11월 성명문을 통해 '이스라엘이 1967년 차지한 지역에서 철수한다면, 아랍과의 공존을 환영한다'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978년, 아랍 국가들은 바그다드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이집트를 달래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우호적인 움직임을 철회한다면, 10년간 50억 달러를 지원해주겠다'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는 '이미 늦었어. 어려울 때 도와줬어야지!'라고 말하듯 1979년 워싱턴으로 날아가 이스라엘과 강화조약을 채결했습니다.
결국 이집트와 중동의 아랍 국가들은 국교가 단절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이집트의 수많은 노동자들은 지금도 아랍 국가들로 가서 노동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국교는 단절되었을 지언정 경제적인 교류는 아직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이집트의 이전과 다른 행보가 한창이던 때, 이란에서는 더 큰 혼란을 야기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이슬람 혁명이죠. 이란은 세계 2위의 산유국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미의 석유 기업들이 이란 정부에 지원하는 유전 이권료만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란은 16세 미만의 인구가 더 많은 젊은 국가였으나, 이렇다할 교육 체계를 만들고자하는 의지가 부족했습니다. 단지 유전 이권료만으로 팔레비 왕조와 상류층은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있었죠. 당시 이란은 아랍의 어떤 국가들보다 서구 문화가 많이 유입된 국가였습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퇴폐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화들까지 들어와있었죠. 종교 단체들이 좋게 볼 리 없었겠죠. 그러나 팔레비 왕조와 비밀 경찰은 종교 단체를 힘으로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교육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란의 젊은이들은 가능만 하다면 서구 국가로 유학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란에서 맛볼 수 없었던 '자유'를 직접 경험하게 되었죠. 그렇게 이란의 젊은이들은 '절대 왕정'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힘으로 억압하는 것이 언제까지고 지속될 리 없었고, 결국 1978년 이슬람 성지인 쿰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이는 삽시간에 이란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당시 국외에 망명해 있었던 종교 지도자인 호메이니가 귀국해 종교 단체들을 이끌게 되었고 팔레비 왕조는 국외로 퇴출되게 되었습니다.
팔레비 왕조는 친미 성향의 왕조였기 때문에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죠. 그러나 팔레비 왕조가 이란에서 퇴출되고 새로운 종교 지도자가 등장하게 되면서 미국은 중동에서 중요한 거점 하나를 잃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란의 쿠데타 집단은 미 대사관을 습격해 직원들을 감금했고, 1년 후 인질 협상이 채결된 이후에나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란은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분한 미국은 지금까지도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비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총 3편이 연재되었는데, 이번 편에서 현재 중동과 미국의 관계가 어느정도 비슷해진 것 같지 않나요? 그런데 아직 등장하지 않은 국가가 있습니다. 바로 이라크죠.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과 철천지 원수 관계였던 이라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이어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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