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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경제의 문을 연 영국 - 파운드는 어떻게 기축 통화가 되었나?

지식 공부방

by umachine 2025. 1. 3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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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기축 통화, 파운드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파운드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산업 혁명을 이야기하곤 합니다만, 다른 국가들 보다 빠르게 산업혁명을 이뤄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은 '돈의 흐름으로 읽는 세계사'라는 책을 읽고 얻은 역사적 사실을 참고해 어떻게 영국이 근대 경제의 문을 열 수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영국은 금본위제를 통해 신뢰받는 화폐를 만들었고, 이와 더불어 산업혁명, 해양 패권, 금융 혁신을 통해 19세기 세계 경제를 지배했습니다."

 

 

 

대영제국의 시작, 해적

 

16세기, 세계는 대항해 시대였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함대를 이끌고 해상을 지배하고 있던 시절, 영국은 해상 주권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렌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년경~1596년)의 등장으로 해상 강국의 반열로 오르게 됩니다. 당시 드레이크는 해적이었습니다. 카리브해에서 스페인 선박과 식민지를 약탈하며 활동하고 있었죠. 그런데, 영국은 국가적으로 해적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렌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1596)

 

 

대부분의 나라가 해적 활동을 하는 시기이긴 했지만, 국가가 직접 지원을 하는 나라는 영국 뿐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왕 엘리자베스 1세의 명령으로 마젤란에 이어 1577년 세계 일주를 시작해 3년 후인 1580년 완주하고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드레이크는 당시의 '무적 함대'라고 불렸던 스페인의 함대와의 전투에서 칼레 항구 습격 작전을 통해 영국군의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영국은 7대양 패권을 잡게 되었고, 이는 영국이 장차 해군 강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조세 제도와 은행

 

그런데 영국은, 강한 힘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조세 제도와 은행을 설립하며 세계로 뻗어나갈 준비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1215년 마그나카르타가 작성되면서, 국왕은 법에 따라 통치해야 하며, 국민들에게 임의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게 하여 절대 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후 법에 기반한 통치, 즉 법치주의의 원칙이 확립되면서 현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마그나카르타(1215)

 


한 편으론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하고, 최초의 국채를 발행합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지속되었던 시기였는데, 군비를 충당하기 위해 잉글랜드 은행이 매입한 국가 채권의 양 만큼 화폐를 만들어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국가의 채권을 단일 은행에 지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이를 통해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적은 부담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해상 패권을 잡아 무역과 식민지 지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

 

그렇지만 내부적인 단단함 만으로는 세계 경제를 장악할 순 없습니다. 영국은 이러한 점을 알고 있었는지 2국표준주의를 표방했습니다. 세계 해상 전력 1등인 영국은 2위, 3위의 군사력을 합친 것 보다 강력한 함대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을 여실히 보여준 전쟁이 대표적으로 아편전쟁이죠.

 

아편 전쟁 당시의 전력 차를 볼 수 있는 사진.

 


당시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홍차를 수입했습니다. 영국 전역으로 퍼친 차 문화와 홍차의 유행으로 인해, 대 중국 상대로 항상 무역 적자를 기록해왔습니다. 영국의 입장에서 불합리한 돈의 흐름이라 판단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해 중국에 수출했습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청나라에는 아편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아졌고, 청나라 정부는 아편 수입을 금지하기에 이릅니다.

 


이 때 영국은 군함을 이끌고 청나라에 개항을 요구하며 전쟁에 돌입합니다. 당시 해군 전력과 육군, 무기력의 차이가 컸기 때문에 청나라는 당연하게도 패배하게 되었고, 난징 조약을 채결합니다.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5개 항구를 개방하고 양 국의 협의 없이 관세를 부과할 수 없는 협정을 채결해 영국의 무역 독점권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치외법권과 배상금 등 영국에게 매우 유리한 조약을 채결했습니다. 이후 2차 아편 전쟁에서도 청나라는 패배하며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기에 이릅니다.

 

 

 

 

 

 

 

금본위제, 그리고 파운드를 기축 통화로 만들다

 

 

앞선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와 체계를 통해 세계 해상 무역을 장악한 영국은 금본위제를 채택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금은복본위제를 채택했는데, 1717년 아이작 뉴턴이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을 설정하면서 금이 은보다 더 중요해집니다. 이를 계기로 금이 은보다 더 신뢰받는 통화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1816년 영국은 금본위제를 공식 도입하고, 1821년 완전한 금본위제를 시행하면서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금본위제 국가가 되었습니다. 금융의 안전성을 다른 나라보다 먼저 구축하게 되면서 국제적으로 가장 신뢰받는 통화가 되었습니다. 이후 유럽의 국가들이 차례로 금본위제를 채택했으나, 제 3국간의 거래에서 여러 통화를 사용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다 보니 가장 신뢰받는 통화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전 세계의 주요 거래 물품은 면제품이었는데, 영국은 세계 시장 점유율 20%가 넘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시티 오브 런던'은 전세계 무역을 장악할 수 밖에 없었죠. 뿐만 아니라 미국은 지금의 영토로 확장되기 이전이었는데, 식민 지배를 하던 국가들과 전쟁을 하거나, 원주민들과의 거래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영국에게 빚을 지게 됩니다. 아마도 영국이 없었다면 지금의 미국이 없었을 수도 있었죠. 다시 말해 영국은 미국의 1대 주주였던 셈입니다.

 

 

 

 

영국의 몰락과 미국 달러의 시대 시작

 

그러나 이러한 영광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급격하게 몰락합니다.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나뉜 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은 새로운 공업 대국이 된 미국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이전의 채무 관계가 역전됩니다. 또한 전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독일에 의해 해상 무역이 차단되었고, 대부분의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영국은 고립이 심화되었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인해 영국은 미국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전 세계의 금은 금본위제를 채택한 미국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미국 달러가 금과 직접 연결되며 파운드의 시대가 저물고 달러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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